[INTERVIEW] 창업자 김용만 사장… “3년전 문닫았으나 伊서 하루 600개씩 디지털 전환”

뉴욕의 명물 ‘킴스 비디오’는 살아있다… “곧 세계 어디서나 빌려볼 수 있게 될거예요”

킴스비디오 시칠리아서 부활중
5만5000편 기증받은 소도시, 킴스센터 건립, 디지털화 박차
작업 완료되는대로 인터넷서 대여서비스 계획

한때 희귀영화 등 30만개 보유
로버트 드니로·스파이크 리…유명 영화인·예술인들 단골
멤버십 번호 까먹은 타란티노 비디오 못빌리고 돌아가기도

뉴욕서 제2의 사업 도전
1970년대말 부모 따라 이민 가…1986년 비디오 1700개로 창업
“킴스 비디오 정서 되살린 이탈리아 레스토랑 낼 것”

뉴욕의 문화주간지 ‘빌리지 보이스’는 지난 9월 12일자에 ‘킴스 비디오의 기구한 운명(The Strange Fate of Kim’s Video)’이라는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실었다. 장장 여섯 페이지에 걸쳐 게재된 이 기사는 뉴욕 최고의 영화 컬렉션으로 유명했던 ‘킴스 비디오’가 2009년 문을 닫으면서 영화 5만5000편을 이탈리아 한 작은 마을에 기부한 사연과, 그 컬렉션을 추적해 이탈리아에서 현지 취재한 내용이었다.

킴스 비디오는 한국인 김용만(57)씨가 1986년 문을 열어 뉴욕 문화의 상징인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의 명소가 된 곳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희귀 영화들이 그득해 미국 대학 영화과 교수들이 이곳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며, 이곳 점원들이 퇴직하면 영화감독이나 대학교수가 되곤 했다.

우디 앨런과 로버트 드 니로, 니콜라스 케이지, 스파이크 리, 밥 딜런…. 뉴욕과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과 배우, 예술인 ‘전부’가 이 비디오숍의 단골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뉴요커들이 이곳을 ‘인스티튜션(institution)’이라 칭할 정도였다.

 뉴욕의 명물‘킴스 비디오’는 10곳 중 9곳이 폐업하고 한 곳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의 컬렉션인 영화 5만5000편을 이탈리아 소도시에 기증한 김용만 사장은“이탈리아에 준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기증했다는 것은 모든 권리를 넘겼다는 건데 이렇다저렇다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 뉴욕=한현우 기자

킴스 비디오는 2005년 뉴욕에 비디오숍 10개를 거느린 대형 체인으로 성장했고,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5층짜리 빌딩 전체를 사옥으로 쓸 정도였다. 그때 회사 이름은 ‘몬도 킴(Mondo Kim)’이었다. ‘몬도’는 김씨의 어릴 적 우상인 이탈리아 감독 갈티에로 자코페티의 1962년작 ‘몬도 카네’에서 따온 것이었다.하여간 킴스 비디오는 그 친근한 상호(商號)와는 달리, 동네 비디오 가게들과는 많이 달랐다.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어느 날 실험영화 한 편을 빌리러 이곳에 왔다. 그런데 멤버십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 유명한 영화감독에게 점원이 대꾸했다. “멤버십 번호를 모르면 빌려갈 수 없습니다.” 타란티노는 빈손으로 문을 나서야 했다.’빌리지 보이스’ 기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비디오 대여업이 위기에 처하자 킴스 비디오는 2008년 말 폐업을 결정했다. 그러면서 10개 점포 중 가장 큰 ‘몬도 킴’에 소장하고 있던 DVD와 VHS테이프 5만5000개를 기증하기로 했다. 단,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3000제곱피트(약 84평) 이상의 공간에 보관할 것, 킴스 비디오 회원들이 계속 영화를 빌려볼 수 있도록 할 것, 영화들을 분류·관리·대여할 인력을 보유할 것’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뉴욕대와 컬럼비아대를 비롯한 뉴욕의 거의 모든 대학과 필름 아카데미에서 기증받기를 원했으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2008년 12월 어느 날, 킴스 비디오의 5만5000개 컬렉션이 컨테이너선에 실려 뉴욕항을 떠났다. 이 배가 며칠 뒤 닿은 곳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작은 마을, 인구 1만1000명의 도시 살레미(Salemi)였다.

‘빌리지 보이스’ 기자는 지난 6월 살레미에 찾아가 이곳에 ‘킴스 센터’라는 건물이 세워진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기증한 지 4년째인 영화들의 디지털 전환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일부는 아직 박스에서 꺼내지도 않았으며, 이 컬렉션을 유치하느라 열 올리던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떠났고, 마침 킴스 센터는 정전이 돼서 그 내부의 극장은 볼 수도 없었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컬렉션을 유치하는 데 기여했던 이탈리아 유명 사진작가 올리비에로 토스카니가 “그 영화들은 지금 쥐 똥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고 탄식한 내용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그 아까운 컬렉션을 왜 뉴욕에 남겨두지 않고 이탈리아로 보냈는가’ 하는 톤의 기사였다.

지난달 25일 뉴욕에서 김용만 사장을 만났다. 그는 “빌리지 보이스 기사를 읽고 기분이 많이 나빴다”고 말했다.

“지난 9월에 살레미에 다녀왔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공백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영화 디지털 전환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어요. 그 기사는 마치 뉴욕에서 제 컬렉션을 기증받을 곳이 있었는데 제가 이탈리아로 보낸 것처럼 썼어요. 그 기자가 결국 저한테 사과했습니다.”

킴스 비디오 컬렉션은 정말 어떻게 된 것일까. 현재 직함이 ‘J&K 펀딩 LLC’라는 투자 컨설팅 회사 대표로 바뀐 김 사장은 “이탈리아에서 하루에 600개씩 디지털 전환이 이뤄지고 있고, 그 작업이 모두 끝나면 예전 킴스 비디오 회원은 물론, 세계 어디서나 온라인으로 이탈리아 킴스 센터에 접속해 비디오를 빌려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창때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은 총 30만개를 넘었다. 5만5000개는 대서양을 건너 이탈리아로 갔지만, 나머지 25만개는 다른 곳에 여러 번에 나눠 기증됐다. 컬럼비아대에 3만8000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2만5000개, 동국대에 3만개, 뉴저지주립대(라마포)에 3만5000개…. 5만개는 아직 맨해튼 한 창고에 보관돼 있고, 뉴저지에 있는 김 사장 집에도 4000개가량이 있다.

김 사장은 1995년부터 영화들을 디지털로 전환해 온라인 대여를 하는 사업을 구상해왔다. 그러나 이 사업이 현실화하기 전에 인터넷이 밀어닥쳤다. 하루가 다르게 매출이 떨어지면서 결국 문을 닫기로 결심했다.

 이탈리아 소도시살레미에 세워진‘킴스 센터’에 지난 9월 방문한 김용만 사장과 킴스센터 인턴들. / 김용만씨 제공

“2008년 9월 1일에 신문에 광고를 냈어요. 비디오 기증할 곳을 찾는다는 내용이었죠. 세 가지 조건만 갖추면 무상으로 기증한다는 것이어서, 한 달 만에 40여곳에서 ‘우리가 기증받겠다’고 연락해왔습니다.”그는 기증받겠다는 곳에 일일이 다 찾아가 그의 컬렉션을 운영할 공간과 예산, 인력이 있는지 직접 확인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뉴욕대는 8000개만 달라고 했고, 컬럼비아대는 1만5000개만 골라가겠다고 했다.그는 모두 거절했다. 이 컬렉션의 표류를 안타까워하던 영화애호가 3명이 15만달러가 든 통장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지금은 공간도 없고 돈도 부족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이 컬렉션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2008년 12월 10일, 이탈리아에서 연락이 왔다. 비토리오 스가르비(60) 살레미 시장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지키겠다”며 컬렉션을 실어가고 운영할 예산이 시의회를 통과했다는 서류까지 보냈다. 스가르비 시장은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TV 진행자이자 정치인이다.

“살레미라는 도시가 1960년대 대지진으로 폐허가 됐는데 스가르비가 2008년 6월에 시장으로 취임한 뒤 살레미를 문화적으로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제 컬렉션을 가져가겠다는 거였죠. 스가르비가 행정을 맡고 토스카니가 프로그램을 짠다는 것이었습니다.” 토스카니는 ‘베네통’ 광고와 에이즈 환자 사진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다.

김 사장은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살레미시의 열정과 성의에 감동했다. 그가 이탈리아에 컬렉션을 넘기기로 결정하자, 킴스 비디오 건물 앞에 컨테이너를 대놓고 6일 만에 5만5000개를 모두 실어갈 정도였다. “대서양 건너 시칠리아로 떠나 보내는 것이었지만 무척 행복했다”고 김 사장은 말했다.

2009년 9월, 살레미시는 김 사장을 초청했다. 그때 처음 시칠리아 섬을 밟은 김 사장은 살레미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산 위의 도시인데 어떤 앵글로 봐도 정말 아름다워요. 길에 놓은 돌 하나까지도 모두 작품입니다. 도시 전체가 수제품이라고 할까요. 정말 특별한 인연이구나, 내가 이 도시에 뭔가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넉 달 후인 2010년 1월, 김 사장은 다시 초청을 받아 살레미에 갔다. 그때 스가르비 시장은 “오늘 뭔가 깜짝 놀랄 선물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킴스 센터’였다. 건물 위에 ‘킴스 센터’라는 간판이 있었고 그 밑에는 ‘그라찌에 미스터 김(Grazie, Mr. Kim·감사합니다 미스터 김)’이라고 써있었다. 그는 “혹시라도 한국 사람들이 여행 왔다가 ‘킴스 센터’를 보면 뿌듯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킴스 센터 개관식에서 김 사장은 자신의 오래된 우상을 만나기도 했다. “450석 극장을 800명이 가득 메웠는데, 제 자리가 맨 앞에 있었고 제 옆에 어떤 노인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낯이 익은 분이었는데 생각이 안 났어요. 제 연설 기회가 있어서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디지털 민주주의(Digital Democracy)’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창작한 작품들을 디지털로 발표할 수 있게끔 하자는 개념이었는데, ‘1300년대 피렌체에서 위대한 르네상스가 시작됐듯이 제2의 르네상스를 살레미에서 시작해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열띤 연설이 돼서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가르비 시장이 앞으로 매년 ‘킴스 센터 어워드’라는 상을 주겠다고 하더니 제1회 수상자로 ‘미스터 자코페티’를 호명하는 거예요. 제 옆자리의 노인, 그 양반이 바로 갈티에로 자코페티 감독이었던 거죠. 그때 92세이던 자코페티가 무대로 나와 저한테 상패를 받는데, 정말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김 사장은 그해 10월 다시 살레미에 초청됐고, 이때 조르지오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도 만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디지털 민주주의’와 ‘디지털 랭귀지’ ‘엔들리스 페스티벌(Endless Festival)’ 같은 평소 구상들을 이탈리아에서 실현할 꿈에 부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은 이탈리아에 안착(安着)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 모든 것의 균열은 2010년 말 시작됐다. 스가르비 시장과 크게 싸운 토스카니가 살레미에서 짐을 싸 떠나버린 것이다. 이어 작년 9월엔 스가르비가 마피아 자금을 쓴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올해 초 시장에서 사임하고 말았다. 킴스 센터를 제외한 모든 논의가 원점(原點)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현재 살레미시에는 중앙정부에서 내려 보낸 행정가가 시장 대행 역할을 맡고 있다. 김 사장은 “그분은 상당히 신뢰가 가는 사람이긴 하지만, 스가르비처럼 야심차게 사업을 벌일 위인은 못 된다”고 말했다. 킴스 센터의 디지털 작업이 완료되면 ‘살레미닷컴(salemi.com)’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그 면목을 확인하게 될 전망이다. 현재 이 사이트는 접속되지 않는다.

1979년 부모를 따라 뉴욕에 이민 간 김 사장은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영화 프러덕션을 전공하고 뉴저지 라마포 컬리지에서 영화사를 전공했다.

전북 군산 출신인 그는 어렸을 적 옆집에 살던 공군 조종사가 16㎜ 영사기로 보여준 영화들을 보며 자란 ‘할리우드 키드’였다. SVA 3학년이던 1986년 친구 2명과 함께 비디오 1700개로 시작한 킴스 비디오는 ‘빌리지 보이스’ ‘앤젤리나 극장’과 더불어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3대 문화축’이었다.

희귀 영화가 많다는 소문이 나면서 영화감독과 영화과 교수들이 킴스 비디오로 몰려들었다. 회원 등급에 따라 120~500달러씩 보증금을 받았는데, 회원 수가 20만명을 넘었다.

페데리코 펠리니나 루이 말의 영화를 대학도서관에서 빌려보려면 며칠씩 기다리던 시절에, 뉴욕 영화광들은 킴스 비디오로 몰려들었다. 1893년 에디슨이 만든 영화,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도 있었다.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 데뷔 전에 연습용으로 만든 영화를 발굴해 내놓으면, 영화사들이 고소하기는커녕 빌려다가 복사해서 팔기도 했다. 그 자신도 박철수 감독 영화 ‘301/302’와 ‘학생부군신위’를 제작했고, 미국에서 ‘3분의 1’이란 영화를 연출해 개봉하기도 했다.

킴스 비디오는 10곳 모두 문을 닫은 게 아니었다.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에 단 한 곳이 남아있었다. 간판 디자인도 예전과 똑같았다. 다만 더 이상 비디오를 빌려주지는 않았다. 비디오와 음반을 파는 소매점이었다. 이곳은 킴스 비디오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직원 몇몇이 운영해 수익을 나눠갖고 있다. 김 사장은 “명맥을 유지해주는 조건으로 내 몫의 수익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지난 3년간 “영화와 관련된 사업을 할 돈을 벌기 위해” 멕시코에서 할로겐 가로등을 LED 램프로 교체하는 사업을 했던 그는 조만간 뉴욕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낼 계획이다. 시칠리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벨리체 킴’이란 와인도 수입할 예정이다.

레스토랑 이름은 ‘킴스 비디오 메익스 어 피자(Kim’s Video Makes A Pizza)’다. 그는 “음악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밤늦게 이야기를 나누는, 킴스 비디오의 정서가 녹아있는 장소가 될 것”이라며 “내가 생각해 낸 ‘디지털 민주주의’를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내 돈으로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출처_조선일보
201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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