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적극적’의 허점

무슨 일이든 적극적, 적극적을 내세우면서 서양식이 유행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큰 허점이 있어. 적극적이라는 게 우선 한계가 없는 얘기 아닌가. 적극적으로 아무리 해봐야 만족이란 영역과 완전이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 저기 노송나무가 있는데, 나무가 시야를 가린다고 베어 버리면, 그 너머에 있는 하숙집이 눈에 거슬리겠지. 그래서 하숙집을 철거하면 그다음 집이 또 눈에 거슬리고, 그런 식으로 확대해 나가다 보면 끝이 없어. 서양식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나폴레옹이든 알렉산드로스든, 이기고 만족했다는 사람은 내 보지 못했네.

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싸움을 하고, 상대가 굴복하지 않으면 재판을 걸어 법정에서 판가름을 하지. 그래서 결착이 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아무리 안달복달해 봐야 마음의 결착은 죽을 때까지 나지 않는 법이니까. 과두 정치가 뜻대로 잘 안 되니까, 대의 정치로 바꾸고, 대의 정치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또 다른 정치 체제로 바꾸고 싶어 하지. 건방지게 강이 가로막고 있다고 다리를 놓고, 떡 버티고 있는 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터널을 뚫고, 교통이 불편하다고 철도를 만들고, 그렇게 한다고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그래 봐야 인간인데, 얼마나 적극적으로 자기 뜻을 관철할 수 있겠는가. 서양 문명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일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평생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문명이야.

반면 동양의 문명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변화시켜 만족을 구하려 하지 않아. 즉 근본적으로 주변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란 대전제하에 발달한 문명이라는 것이 서양 문명과 크게 다른 점이지. 부모 자식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고 해서 서양 사람들처럼 그 관계를 개선해서 균형을 맞추려고 하지는 않아, 부모 자식관계를 있는 그대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한 후에, 그 관계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지. 부부나 군신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무사와 평민의 관계도 그렇고, 자연을 보는 시각도 그렇고. 산이 높아 이웃 마을에 갈 수 없다면, 산을 허무는 대신 이웃 마을에 가지 않고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산을 넘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키우는 거야.

그러니 자네도 생각해 보게. 불교든 유교든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파고들고 있지. 아무리 자신이 위대하다 해도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지는 해를 다시 뜨게 할 수도 없고,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도 없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이니까 말이네.

– 나쓰메 소세끼, ‘고양이로소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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