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따라쟁이 한국… 외계인 돼야 살아남는다”_’카림 라시드’ 인터뷰

한국 기업들이 사랑한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의 일침

숲 안에 있으면 나무밖에 못봐
난 스스로 지구인이 아니라고 생각 외부 관점서 보면 창의적일 수 있어
한국은 A업체가 만들면 B도 생산 소모적 전쟁만 하다 제자리 맴돌아 구글·야후같은 기업…
당신만의 ‘틈새 언어’ 개발 위해 사고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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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란한 디자인만큼이나 카림 라시드는 외양과 발언도 튀었다. 그는“나는 아이디어가 정말 많은데 그걸 소화할 기회가 부족해 좌절하곤 한다”고 말했다./카림 라시드 제공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Rashid)씨는 자신의 디자인만큼이나 튀는 차림새를 하고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2m는 족히 됨직한 훤칠한 키에 아래위로 연노란색 양복을, 재킷 안에는 형광에 가까운 밝은 노란색 셔츠를 받쳐 입었다. 거기에다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충만한 색”이라고 본인이 극찬했던 핑크색 점무늬가 들어간 하얀 캔버스화와 하얀색 뿔테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모습은 애니메이션에서 막 튀어나온 괴짜 캐릭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라시드씨는 최근 TV조선 주최로 열린 창조경제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의 이름은 낯설지 몰라도 그가 디자인한 작품은 우리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투명한 파란 색상에 뚜껑을 컵처럼 사용할 수 있는 파리바게뜨 생수병, 둥그스름한 삼각기둥 모양을 한 애경의 ‘순샘버블’ 주방 세제 용기, 티타늄 소재로 만든 현대카드의 VVIP 카드 ‘더블랙’도 그의 손을 거친 제품이다.

자동차, 건축, 생활용품 등 전방위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그가 디자인에 대해 내린 정의(定義)는 이랬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 자체가 생물적인 재생산과 지적 재생산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적인 재생산이라는 것은 ‘진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의성을 가지고 진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바로 디자인입니다.”

그는 어떤 질문을 받아도 속사포처럼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2003년 그를 인터뷰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업계에서 가장 말이 많은 사람”(the biggest mouth in the business)이라고 표현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창의력의 원천은 외계인의 관점으로 보는 것

“아이디어의 원천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이 행성(지구)에 살고 있지만, 스스로 지구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인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창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시선으로 세상을 둘러보면 감각이 더 예민해지니까요. 자유로운 시선을 갖고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카림 라시드 선언문(Karimanifesto)’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해 본다. “나는 사람들이 노스탤지어, 케케묵은 전통, 오래된 관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보고 싶다.”

이는 “디자이너는 지금 현재를 반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그의 콘퍼런스 기조연설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디자이너를 비롯한 예술가는 항상 현재를 바라보고, 그래야만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앞서 간다고 생각하고, ‘예술가는 미래를 지향한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라시드씨의 전통 관(觀)은 어떨까. 그는 “물론 오래된 것과 전통에도 가치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존중하고,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해야 하지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전통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가?’라고요. 그러면 전통과 관습이 우리의 삶에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겁니다. 마치 박물관 유물처럼 말이지요.”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디자이너가 반영해야 하는 ‘현재’는 기술 발전 덕택에 모두가 인터넷 등을 통해 창의성을 자유롭게 발현할 수 있는 ‘창의성의 민주화’가 이뤄진 시대이자, 10만년간 인류가 살아왔던 아날로그의 시대를 통과해 갓 디지털 세계로 진입한 시대다.

“아날로그 시대와 현재는 참 많이 다릅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럭셔리(luxury)’란 귀한 재질의 금속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귀하다고 여겨지는 대리석이나 광물을 캐내기 바빴습니다. 디지털 시대에선 더 이상 지구 자원을 약탈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가볍고,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시대는 일시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것을 더 이상 소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건축물 역시 디지털화할 수 있습니다. 과거엔 교회 하나 짓는 데 300년씩 걸렸고,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보기 전에 죽는 건축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건축물도 일시적으로 만들었다가 사라지는 식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디자인을 할 때 이런 점들을 늘 생각합니다.”

럭셔리는 마케팅의 신화일 뿐

라시드씨의 디자인 철학 가운데 하나는 ‘디자인의 민주화’다. 즉, 일반인도 예술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수준 높은 디자인이 대중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됐는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디자인이 ‘럭셔리’와 동의어가 된 상황입니다. 제품에 디자이너 이름이 붙으면 값이 훨씬 비싸집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디자이너의 존재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의 이름이 붙는 제품은 오히려 가격이 더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디자이너는 저렴한 가격으로 무엇인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로봇에 의존한 작업 과정과 컴퓨터 기술 덕택에 질 좋은 제품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생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상품이 비싸야 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장인들이 만드는 수공예품처럼 손이 아주 많이 가거나, 대단히 비싸고 희귀한 재료를 사용하는 예외를 제외하고선요.

하지만 고급 제품을 취급하는 세계에선 제품이 재료나 작업 과정이 아닌, 마케팅과 브랜딩에 의해 가격이 올라갑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방은 가죽으로 만들고, 다른 가방은 천으로 만든다면 가죽 가방이 비싼 것이 당연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턱없이 비싸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그건 마케팅이 만들어낸 신화이며, ‘소비 오류(consumption fallac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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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능적 미니멀리즘’이라는 디자인 철학을 반영하듯 단순한 디자인에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라시드의 작품들. 그의 작품에 대해 대중은‘환상적이다’‘유치하다’는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카림 라시드 제공

적은 것이 오히려 많은 것(less is more)

라시드씨는 자기 디자인의 특징을 ‘관능적 미니멀리즘'(sensual minimalism)이라고 표현했다.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동시에 부드럽고 화려하다는 뜻이다. 현란한 외양으로 봐서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라시드씨는 인터뷰 도중 스스로를 가리켜 “‘적을수록 더 많이 얻는다(less is more)’는 말의 맹렬한 신봉자”라고 했다. 그는 “‘적다(less)’는 개념은 매우 인간적이고, 만약 어떤 물건이 정말 단순하고 간결하다면 그건 더 인간적인 디자인에 가깝다”고 말했다.

-왜 간결한 것이 더 인간적인가요?

“저는 인간은 단순해질수록 더 감각적이 되고, 그것은 인간의 본모습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제가 아주 얇은 네 개의 다리에 아주 얇은 등받이에,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게 몸에 밀착되는 의자를 하나 만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전 그 감각적인 의자가 매우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감수성을 확장시켜 주니까요.”

한국 제품에서 한국 DNA를 찾을 수 없다

-한국 기업과도 많이 협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 기업 제품의 디자인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솔직히 따라 하기(me-tooism)가 너무 만연해 있고, 모든 제품이 거의 비슷비슷해 보입니다. 저는 묻고 싶었죠. ‘대체 한국의 DNA는 어디 있느냐’라고. 저는 한국인의 DNA를 보여줄 수 있는 제품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로(zero)였죠. 모든 제품이 극도로 일반적이었으니까요.”

라시드씨는 “미국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구글이나 야후 등(창의적인 기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 창조경제를 강조하고 있는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한국판 구글이나 야후를 만들 수 있을까.

“당신만의 틈새 언어(niche language)를 만들 수 있도록 사고방식 자체를 완전히 전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비전과 철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따라 하기’ 일변도의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과연 창조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라시드씨에 따르면, 따라 하기 일변도 풍조는 극히 소모적이다. A라는 업체가 그런 제품을 만들면 B업체도 따라 할 테고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모든 업체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며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업은 그런 쓸데없는 곳에 힘을 소모하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가?’에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제가 나이프와 포크를 만드는 회사와 디자인 논의를 한다고 칩시다. 그들은 자신과 경쟁사가 만드는 나이프와 포크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려 들 겁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은 나이프와 포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그만두고, 먹는 행위, 혹은 식(食)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오늘날은 음식을 먹는 행위도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집에 있는 식탁에서 밥을 먹지 않지요. 기업은 그런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고, 새로운 트렌드와 함께 달려가야 합니다. 아까 기업들끼리 서로 따라 하고 베끼고 있다고 했잖아요? 언제 이런 행위가 멈출까요? 바로 그들이 진정한 비전을 찾을 때입니다.”

새로운 영역에는 또 다른 도전 기다려

라시드씨는 작품과 옷차림뿐 아니라 인터뷰 발언도 튀었다. “좌절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나는 아이디어도, 하고 싶은 것도 넘쳐 나는데 그걸 받쳐줄 기회가 많지 않아 늘 좌절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동차, 건축물, 각종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글쎄요. 저는 창조적인 사람들의 본성 가운데 하나일 것 같다고 생각해요. 다른 지식 분야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본성 말입니다. 새로운 영역에는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전혀요. 사실 ‘천재’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요. 저는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재능을 타고났고, 무언가 멋진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크건 작건 간에요.”

출처_조선일보
2013.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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