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UNTAMED YOUTH_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 인터뷰

젊은 디자이너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고, 현대적이고 무심한 ‘쿨’의 대명사가 된 알렉산더 왕.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29세 럭키 가이를 〈보그〉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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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래퍼 A$AP 록키, 모델 카티 네셔, 스케이트보더 딜란 리더, 배우 조 크라비츠,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 래퍼 아질리아 뱅크스. 의상은 모두 알렉산더왕 (Alexander Wang).

“소리 질러!” 전설적인 DJ 디플로(Diplo)가 외쳤다. 천장이 낮은 지하 주차장은 푸른 조명에 휩싸인 채 패션에 미친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루니 마라식 뱅 헤어에 빨간 샤넬 백을 메고 블루 프록을 입은 젊은 남자, 하늘하늘한 튤스커트에 클레오파트라 눈을 한 에이미 와인하우스 같은 한 쌍, 영화 ‘Brideshead Revisited’풍의 블레이저와 컷오프 쇼츠를 입은 남자들, 비스듬한 베일 베레모에 드레스를 입은 다프네 기네스 워너비도 있었다. 춤추는 사람들은 빨간 경찰봉을 휘둘렀고, 키 큰 남자 모델들은 물싸움을 시작했으며, DJ 턴테이블 뒤의 파티 주인공은 노래 가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맨해튼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일 수도, 런던의 이스트 엔드일 수도, 스타일과 음악의 전문가들이 광란의 하모니를 이루는 곳이라면 지구상 그 어디일 수도 있다. 그것이 핵심이다. 사실 이곳은 베이징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왕이 얼마 전 문을 연 플래그십 매장 지하. 우리는 쿨함을 정의하는 디자이너를 축하하기 위해 지금 이곳에 모였다.

왕은 2011년 소호 매장을 오픈한 후 도쿄(일본은 그에게 가장 큰 국제 시장)나 런던에 두번째 단독 매장을 오픈하는 것을 생각 중이었다. 그러나 더 크고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자수성가한 사업가 어머니가 활동하고 있는 상해는 확실한 선택이었고, 그 다음은 베이징이었다. “상해에서 쇼핑하는 사람들은 트렌드를 따라갑니다. 반면 베이징 사람들은 트렌드를 만들죠.” 현재 왕의 아시아 지역 사업 확장은 계속되고 있다. 왕은 베이징 매장 이후 홍콩 카울룽에 매장을 오픈했고, 이번 가을과 내년 봄 상해에 두 개의 매장을 더 오픈할 예정이다. 또한 칭다오와 항저우를 포함한 다른 도시들도 탐색 중이다.

왕과 그의 팀은 베이징의 매장 이벤트 문화를 경험하면서 아주 빠르게 배워나가고 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의 파티에 오지 않습니다. 수수료도 엄청나죠”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왕은 제대로 된 파티를 열기 위해 자신의 패거리를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디플로, A$AP 록키를 비롯한 그의 핵심 친구들이다. 대부분 왕이 뉴욕에 온 첫날부터, 혹은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다. “쭉 친하게 지내왔어요. 알렉스는 처음 만났던 열네 살 때와 변함없거든요”라고 에메랄드 캐롤은 말했다. 왕이 2008년 CFDA/ Vogue 패션 펀드를 받기 위해 팀을 이루며 처음 만난 조 크라비츠는 이 서클에 새롭게 추가된 친구다. “처음 보자마자 마음이 통했어요”라고 왕은 말했다. 오늘 크라비츠는 왕의 블랙 레드 스트레치 시스를 입고 진홍색 립스틱을 발랐다. 펜 베이즐리를 대동한 그녀는 그야말로 알렉산더 왕 레이디-그의 의상들이 아주 강렬하게 표현하는 태도, 즉 미래따윈 걱정하지 않는 도회적인 시크함을 풍기는 여성-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죠.” 왕은 설명했다. “결국 패션은 스타일이고, 스타일은 당신이 입는 옷뿐 아니라 당신이 먹는 것, 가는 곳, 어울리는 사람들 모두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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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10대 시절 그는 VH1/ Vogue 패션 어워드를 보기 위해 학교를 빼먹을 정도로 패션에 중독된 아이였다. 특히 톰 포드, 마크 제이콥스, 마르탱 마르지엘라, 헬무트 랭의 외골수적이고 명확하게 정의된 비전을 존경했다. 그의 컬렉션에는 그들의 작품을 상기시키는 부분들이 있다. “그것은 제 머릿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제가 성장할 때 경험한 이미지들이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마크와 톰이 자신들의 성장기인 70년대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말이죠.” 열다섯 살 때 왕은 형 데니스를 설득해 그의 결혼식에서 첫 패션쇼를 선보였다. 그는 고교 친구인 빅토리아와 바네사 트레이나를 모델로 세웠고, 그들에게 90년대 베르사체 꾸뛰르에서 영감을 얻은 의상들을 입혔다. “천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체인을 늘어뜨리고, 인조 깃털 헤어밴드를 곁들였지요.” 결혼식에 모인 가족들은 박수 쳐줄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지만, 왕의 10대 사촌이 훤히 비치는 슬립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그들의 열정은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들은 늘 저를 지지해줬어요”라고 왕은 회상했다. 그는 자신이 꿈꾸던 계획을 단호하게 실행에 옮겼다. 파슨스 패션 스쿨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또한 플랫아이언 빌딩에 있는 형의 아파트 구석에 커튼을 치고 디자인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그 공간에서 아주 멋진 추억을 쌓았어요. 친구들을 초대하고 피자와 BBQ를 주문해서 테이블에 둘러앉아 먹곤 했지요.” 데니스의 아내인 에이미는 그가 첫 번째 컬렉션으로 파슨스 2학년 때 선보인 스웨터 다섯 벌의 캡슐 컬렉션 때 회계, 운송, 홍보일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저는 그 스웨터들을 위탁 판매할 수 있는 매장을 하나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스웨터들을 작은 수트 케이스에 넣고 길을 떠났다. 그의 집요함은 성과가 있었다. 마침내 매장 세 곳에서 스웨터를 위탁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일주일 후 제품들은 동이 났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어요”라고 왕은 회상했다. “아주 작은 규모로 그 일을 하면서 학교도 계속해서 다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파슨스는 3학년 때 제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왕 브랜드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다음 시즌엔 바니스 같은 매장들이 아우성을 쳤다. 컬렉션이 매장에서 판매되었을 때 왕은 실망했다. 그는 “왜 우리 코너는 없는 거지? 다른 브랜드들은 모두 자기 코너가 있잖아!”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곧 그러기 위해선 풀 라인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2007년 풀 라인을 디자인했고, 두 시즌 후 그는 너무 회사를 빨리 확장하고 있다는 판매 에이전트들의 충고에 굴하지 않고 액세서리 라인을 론칭했다. 지금도 가장 잘 팔리고 있는 도나 호보(Donna Hobo)와 브렌다 체인 (Breda Chain)이라는 두 가지 백으로 말이다. 왕은 슈즈 스타일도 하나 개발했다. 그리고 여전히 생산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선견지명이 있던 매장 오프닝 세리머니-20켤레를 주문한-에서 그에게 전화를 했다. “당신 구두를 사겠다는 대기자가 900명이나 돼요!” 왕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신나는 시즌이었죠. 그리고 우리는 2008 CFDA/Vogue 패션 펀드를 받았습니다. 그것 역시 아주 중요한 일이었어요. 다이안 본 퍼스텐버그가 우리의 멘토가 되었으니까요. 어떤 면에서 그녀는 두 번째 엄마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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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돈을 충실하게 회사에 재투자했다. “처음부터 직접 이 브랜드를 만들었기 때문에 제품 디자인에서 매장 디자인과 제품 포장, 가격, 판매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직접 감독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요”라고 왕은 말했다. “제 이름이 문에 붙어 있으니까요.” 분명 왕의 헌신은 그만한 보상이 있었다. CFDA/Vogue 패션 펀드 상을 수상한 지 겨우 4년이 지난 지금, 회사 CEO인 에이미, CPO인 데니스와 함께 왕은 165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었고, 그의 쇼룸, 스튜디오, 그리고 디자인 사무실들은 소호에 위치한 창고를 개조한 건물의 4개 층을 차지하고 있다. 그곳은 근처에 있는 그의 아파트와 매장처럼 쿨한 단색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의 아파트와 매장은 대학 때부터 단짝 친구였던 건축 디자이너 라이언 코번과 작업을 했다. 세련된 검정 베니스 회반죽 벽과 공중에 떠 있는 대리석 계단이 있는 베이징 매장은 조셉 더란드 작품이다. 그의 주택과 상업 프로젝트들은 오랫동안 왕의 아이디어 보드를 장식해왔다.

왕은 중국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부모님 모두 대만에서 태어났지만 외가 쪽은 사천, 친가 쪽은 후난 출신이다. 20여 년 전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수출입 사업이 상해에서 더 효율적으로 운영될 거라고 예측했고, 그 후 내내 그곳에서 살고 있다. 왕은 여덟 살 때 1년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곳이 정말 싫었습니다. 지금의 중국과는 너무나 달랐어요. 쇼핑몰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죠. 백화점에서는 살아 있는 닭을 팔았어요. 온통 야단법석이었고 캘리포니아에서 익숙했던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샌프란시스코(그의 형제들이 그의 법적 보호자가 되었다)로 돌아와 사립 기숙학교에 다니며 사랑하는 와 를 끼고 살았다. 그리고 거침없고 독립적인 성향이 점점 강해졌다. 2012년 중국은 그때와 아주 다르다. “저는 하루 24시간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를 좋아합니다. 매장들이 1년 365일 밤 10시까지 영업하는 그런 곳 말이에요.” 브랜드에 충실한 그는 이 나라의 위대한 문화 건축물들보다 현대미술가 풍경이나 베이징의 활기넘치는 나이트 라이프-바와 카페가 즐비한 호우하이(Houhai) 호숫가나 환각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도시의 패셔너블한 노래방(그의 유창한 중국어와 프로 가수 같은 노래 솜씨가 도움이 된다)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나이가 들어가는 모든 신동들처럼 왕도 1년 후 서른 살이 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늘 그를 정의해온 것은 그의 젊은이다운 조숙함과 자기 세대 문화와의 밀접한 연관성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그것을 그만두죠?”라고 그는 묻는다. 그는 뮤직 페스티벌에 가고 새로운 밴드들이 연주하는 것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리서치를 통해 베이식 아이템으로 구성된 왕의 T 라인 광고 캐스팅이 결정되곤 한다. “나이가 들어도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될까요?”라며 그는 조바심을 냈다. 하지만 왕의 고객들은 그와 함께 나이 들 것이다. 그는 90년대 스포츠웨어와 접목된 세련된 광택 처리와 드레이프가 특징인 2012 가을 컬렉션을 ‘아주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꼽았다.

2013 봄 컬렉션은 왕의 오랜 팬들조차 다시 한번 놀래킬 만큼 성공적이었다. “왕의 재능을 일찌감치 눈치 챈 사람으로서 그의 매력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컬렉션은 블랙, 화이트, 실버의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왔다.” 의 린 예거는 말했다. 그리고 석 달 후, 왕은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떠난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다음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첫 컬렉션을 선보인 지 5년 만이다.

왕은 자신이 전통적인 젊은 디자이너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음을 인정했다. 그는 실용적으로 매장과 고객들에게 각 카테고리에서 필요한 수만큼의 아이템들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덕분에 브랜드를 성장시킬 수 있는 돈을 벌었고, 순수한 디자인회사로 출발했다면 할 수 없었을 것들을 할 수 있었어요. 이제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저는 레디투웨어를 배짱 있게 밀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하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굉장히 흥분됩니다.”

글 / 해미시 보울스(Hamish Bowles), PHOTO/ NORMAN JEAN ROY, JAMES COCHRANE, WWD, MONTROSE

출처 – Vogue 2013. 1월

http://www.vogue.co.kr/content/view_01.asp?menu_id=02030200&c_idx=0122030200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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