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창조성을 촉발하는 매질, 종이

종이는 오늘날 ‘인쇄 미디어’라 불리지만, 옛 미디어의 전근대성을 전부 종이에 짐 지우는 말 같아서 거부감이 든다. 물론 종이는 문자와 관련하여 인간의 창조성을 촉발했지만, 그 매력은 단순히 인쇄를 할 수 있는 얇은 면으로 집약되는 것은 아니다. 종이의 촉발력은 우선은 그 백색에 있으며, 나아가 그 탄성에 있다. 자연물 중에 하얀 것은 그리 많지 않은데, 종이는 뛰어나게 하얗다. 베이지색 나무껍질을 짓이겨서 물속에서 분산시키고 뜰채로 떠올려 햇빛에 말리면 눈부실 정도로 하얀 물질이 나타난다. 그것은 손가락으로 집어 세우면 꼿꼿이 설 만큼 탄성 있는 허리가 있다. 하얗고 탄성이 있다는 것은 달리 보자면 더러움을 잘 타고 잘 찢어진다는 매우 가냘픈 존재라는 것이다. 이 나긋나긋하고 하얗고 팽팽한 면 위에 인간은 까만 ‘먹’으로 글자나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성을 향한 약진이며, 잠재된 것이 명석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잇달아 자각하는 감응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청중으로 가득 찬 쥐 죽은 듯 조용한 콘서트홀에서 솔로 바이올리니스트가 첫 음절을 켜는 순간과 같은 긴장감을 종이는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훌륭한 퍼포먼스가 이루어졌다면 하얀 종이 위에는 그 성과가 눈부시게 우뚝 솟는다. 그러한 종이의 촉발력을 통해 언어나 그림을 그리고 활자를 엮어나가는 능동성이 인간의 감각 안에 생겨났다. 각오도 결의도 행동거지도 몸짓도, 영원이나 찰나에 대한 감수성도, 인간은 반드시 종이에 남겨 왔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 하라 켄야, ‘내일의 디자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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